
홍경래는 평안도를 근거지로 삼아 봉기를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1811년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고 특히 평안도가 그 피해가 극심하자 격문을 붙여 봉기했다. 자신들의 봉기에 대한 명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 격문을 붙였던 것. 다음은 그가 작성한 격문의 일부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 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권세 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민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돌아보면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초반 홍경래군의 기세는 대단하여,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였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정주성에서 항거하다가 홍경래는 전사하고, 대부분의 지도부가 검거되었으며, 약 2938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어 반란은 진압된다.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죽었으나, 당시 핍박받던 농민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변혁을 바라는 조선인들에게 홍경래의 실제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변혁의지를 키워갔다는 뜻인데 이는 홍경래란이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정치적 반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우환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백성을 살피려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순조이지만 순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왕이라 볼 수 있다. 순조26년(1826) 봄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
순조는 굶주린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알고 왕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앞장 섰다. 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 것 역시 민생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생에 신경을 기울였다고 해도 세상의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대부터 안동권씨가 권력을 잡아 헌종 철종대에 이르는 60여 년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조선왕조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참고문헌 :
「[王을 만나다·32]인릉 (23대 순조·순원왕후)」, 염상수, 경인일보, 2010.05.06
「홍경래」, 이근호, 네이버캐스트, 2011.01.21
「순원왕후」, 김범, 네이버캐스트, 2012.04.09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1.01.24
『조선왕릉 답사수첩』, 문화재청, 미술문화, 2006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 편집자 주
동아사이언스가 발행하는 인터넷 과학신문 ‘더사이언스’(www.dongascience.com)가 공룡유산답사기, 과학유산답사기 2부, 전통마을을 찾아가는 과학유산답사기 3부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가는 과학유산답사기 4부를 연재합니다. 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세계문화유산 속에 숨어 있는 과학지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